서예가 여태명

2026-01-04 / 서예가 여태명에 댓글 닫힘

칼럼

‘효봉 여태명은 ‘민체(民體)’를 창안해 한글 서예의 지평을 넓힌 서예가이자, 글씨·그림·시를 아우르며 문자 예술을 재해석해온 작가입니다.

효봉 여태명(曉峰 余泰明, 1956– )은 한국 서예사에서 ‘민체(民體)’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서예가이자, 글씨와 그림, 시와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문자 예술의 확장을 실천해 온 작가다. 전북 진안 백운에서 태어나 한글서예와 민중적 서체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그는, 전주 톨게이트 ‘전주’ 현판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 ‘평화와 번영을 심다’의 글씨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동시에 그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후학을 길러 온 교육자이자, 신문 제호·간판·공공디자인·디지털 폰트까지 아우르는 문자 디자이너로서 한국서예의 외연을 넓혀온 인물이다.

1. 삶과 학문적 배경
여태명은 1956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한국화 전공)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한국화와 회화를 두루 익혔다. 이후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예문화예술학과(구 순수미술학부 서예전공)에 몸담아 조교수로 시작해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교단에 서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2.민체(民體)와 한글 서예의 선구자

    한글 서예의 맥락에서 여태명이 갖는 가장 큰 공적은 ‘민체(民體)’를 발견하고 이론화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반, 그는 자신의 논문에 서 처음으로 민체라는 이름을 제안하며, 궁체와 판본체 중심으로 이해되던 한글 서체 체계를 새롭게 재편했다. 민체는 조선 후기 완판본, 민간 필사본, 장터 간판과 상점의 호구(戶口) 등에서 자연스럽게흘러나온 백성들의 손글씨를 가리키는 말로, 일정한 규격에 갇히지않고 삶의 리듬과 감정을 품은 서체이다.
    여태명은 전주향교에 남아 있는 완판본 목판과 전주의 옛 필사본들을 오랫동안 조사하면서, 이름 없이 흘러가던 이 글씨들을 ‘민체’라고 명명하고 연구와 창작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언론은 그를 “우리 글·우리 민체의 개척자”, “민체의 창안자”로 소개하며, 한국 서예사에서 민체가 하나의 독립된 서체로 자리 잡는 과정의 핵심 인물로 평가한다.

    3.글씨·그림·시가 만나는 문자 예술
    여태명은 자신을 단순한 서예가가 아니라 ‘서화가’, ‘문자예술가’로 규정하는 여러 언론 기사에서 드러나듯, 글씨와 그림, 시를 한화면에서 결합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2014년 서울 인
    사동 한국미술센터에서 열린 전시 「문자가 내게 다가왔다」, 2020년 정년 기념전, 그리고 최근의 초대전들까지, 그의 작품들은 수묵채색 화면 위에 시구와 문장을 배치해 문인화와 현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화면은 종종 한글·한자·알파벳·다양한 언어의 단어들이 겹겹이 중첩된 문자 풍경처럼 보인다. 2019년 「평화와 번영」 전시에서는 ‘평화’라는 단어를 한글뿐 아니라 폴란드어, 체코어, 아랍어, 헝가리어 등 여러 언어로 써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기도 했다. 이는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의 평화와 소통을 문자 예술로 시각화하려는 시도로 읽힌
    다.

    또 다른 작업군에서는 민체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이 두드러진다. 옛 이야기의 한 장면, 속담 한 줄, 일상의 짧은 문장을 과감한 여백과 함께 풀어내며, 글씨가 하나의 인물처럼 화면 위를 걸어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작업 세계 때문에 비평가들은 여태명의 작품을 두고 “시, 서예, 그림이 화선지 위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평한다.
    민체는 이후 그의 대표적인 작업 언어가 되었다. 전주 톨게이트와 전주 인터체인지의 한글 현판, 전주지방법원·전주IC, 그리고 여러 신문·지역 언론사 제호에 사용된 글씨들은 모두 민체를 바탕으로 한 여태명의 디자인이다.
    어린아이가 쓴 듯 비뚤비뚤하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힘과 균형이 서려 있는 이 글씨들은 지방 도시에 대한 인상을 바꾸는 상징적인 시각 자산이 되었다.

      4. 교육자·연구자·폰트 디자이너로서의 업적
      여태명은 오랜 대학 교육을 통해 탄탄한 제자군을 형성하는 한편, 서예 이론과 민체 연구, 디지털 폰트 개발까지폭넓게 활동해 왔다. 전북일보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논어·맹자에서부터 흥부놀부전 같은 민간 필사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고문헌과 필사 자료를 수집해 민체 연구의 토대를 쌓았고, 정년 이후에는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연구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는 ‘효봉 개똥이체’ 등 개성 있는 한글 서체를 개발해 방송 자막과 출판, 광고에 보급하는 등 현대 캘리그래피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의 제목 글씨와 여러 지역 언론사의 제호, 각종 공공기관간판 등에 그의 폰트와 필체가 사용되면서, 민체는 한국인의 일상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2018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소나무 기념식수를 한 자리에는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화강암 표지석이 세워졌다. 이 문구를 쓴 이가 바로 여태명이다. 그는판본고체, 완판본 필사체, 민체 등 세 가지 안을 제시했고, 그 가운데 민체가 최종 채택되었다. 이 표지석은 민체가 국가적·역사적 장면에서 사용된 대표적 사례로, 한글 서체와 평화의 메시지가 만나는 상징적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전라미술상, 동아미술상, 전주시예술상, 한국미술상, 자랑스런대한민국시민대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며 예술적 성취와 사회적 공헌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5. 최근 행보와 예술적 지향
      정년 이후에도 여태명의 작업은 더욱 왕성해지고 있다. 전주, 대구, 서울을 비롯해 파리·베를린·베이징·상하이·선양 등 국내외 주요 도시에서 27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며, 한글 서예의 현대적 확장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최근에는 ‘송·죽·석 삼우(三友)’를 주제로 한 특별 초대전에서 소나무·대나무·바위라는 동양 회화의 상징적 소재를 민체와 결합시켜, 겨울 스승과 같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미학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선보였다.